종의 기원 신의 기원을 읽고

관리자 | 2012.07.10 10:46 | 조회 1451

『종의 기원 신의 기원』을 읽고

김용섭

목차

I.들어가는 말

II.몸말

1.종교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2.과학은 종교의 적인가 동지인가?

3.예수그리스도의 삶에서 본 과학

4.신의 존재는 변하지 않는가?

5.생명의 이해

III.나가는 말

 

 

I.들어가는 말

‘종의 기원’ ‘신의 기원’ 이라는 제목의 책을 대하는 순간 나는 이 책이 무엇을 말 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개념의 정리가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의 목록 순서를 읽다가 나의 예상이 적중한 듯한 기쁨이 들었다.

저자 리처드 도킨스 여러 책에서 말했듯이 나또한 종교가 무익 할뿐 아니라 아주 유해한 망상으로서 하루 속히 폐기되어야할 구시대유물이다 라는 주장에 고개를 저의며 서문을 읽으면서 다시 과학과 종교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협력관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넣고 책을 읽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도킨스가 구분하는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 과학과 종교의 관계, 신에 관한 이해, 우주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 등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가 다르지 않고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한 인간 정신의 두 갈래 여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이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인이 가져야할 자세로서 생태학적인 관심 즉 창조질서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간들과 자연과의 상호의존에 대해 이해함으로서 돌봄과 살핌의 복음을 전해야 함도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첫째 종교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고학은 종교의 적인가 동지인가? 셋째 예수그리스도의 삶에서 본 과학, 넷째 신의 존재는 변하지 않는가? 다섯째 생명의 이해 로 나누어 견해를 밝히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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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몸말

1.종교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종교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있을 뿐이다.

종교는 전쟁을 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여기에 대해서 결론을 말하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은 경제적인 탐욕과, 정치적인 야욕, 윤리적이거나 인종적인 편견, 국가에 대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신념이 동기가 된 것이지 단지 자신이 믿는 종교로 인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흔히 종교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은 오히려 전쟁의 수준을 넘어 후세까지 이어지는 복수전을 방불케 하고 있다고 생각이들 정도이다.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의 경우를 보더라도 경제적인 이익과 정치적인 영향에 의해서 일어난 전쟁이었지 단지 종교적인 이유로 일어난 전쟁이 아니었다고 본다. 미국은 자국의 정부의 불만적인 요소를 정치적으로 이슬람의 국가인 이라크를 상대로 해서 해결하려 했던 것이라고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양민이 죽는 처참한 전쟁을 하였다는 비판이 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볼 때 전쟁은 근본적으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한 왜곡된 마음과 편견, 재화를 빼앗으려는 탐욕에서 발생한 것이지 결과 종교 간의 갈등요인으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전쟁을 가장한 십자군 전쟁도 사실은 교황의 세력과 왕권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종교적인 상황으로 엮어 벌였던 것이 아닌가? 이로 인해 수많은 양민이 또한 죽지 않았던가?

나는 모든 종교가 선을 추구하지 악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를 통해 인간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한 삶을 영유하며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것이 종교의 본질의 한 부분이 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나는 종교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벌여진 인간의 악한 행위를 더 열거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신학자의 길을 걷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이다.

2. 과학은 종교의 적인가 동지인가?

과학과 종교는 다르지 않고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한 인간 정신의 두 갈래 여정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과 종교 간의 대립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는 종교라는 독단성에 의해 우리의 이성 즉 과학에 너무 무지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의 배경은 지동설에 대한 로마교회의 비판, 헉슬리와 윌버포스 주교의 논쟁 등을 통해서 과학과 신학의 관계가 서로 화해 할 수 없는 관계라고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과학과 신학, 신학 종교 사이의 간학제적 연구(interdisciplinary research)로 이들의 관계가 진척 되어왔으며, 나아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크게 갈등과 독립, 대화, 그리고 통합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협력보완관계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과학과 종교가 추구하는 본질은 참된 지식과 통합된 앎의 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지 형이상학적인 가정이나 인간의 헛된 환상에 기반을 둔 것인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실재에 대한 합리적인 탐구를 통해 서도 충분l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폴킹혼은 말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실 나부터 창조론과 진화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놓고 진화론을 배격 하는 것이 창조신앙을 지키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그가 과학자로서 당연히 우주와 생물의 발달과 진화과정 있다는 것과 신학자로서 하나님의 창조를 변화한다는 생각에 수긍을 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하면 과학과 신앙이 모두 진실함을 바탕을 두고 있고, 이에 모두 합리적인 인간의 지적 탐구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를 잇는 지적인 다리를 놓기 위해 제안된 폴킹혼의 비판적인 실재주의는 풍성한 진화의 결실을 맺은 우주의 배후에 신성한 실재와 인간성에 깃든 지성이 어떤 식으로든 분명한 연관이 있으리라는 자연 신학적 확신을 근거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생명신학은 우주의 충만한 생명의 기운과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전일적인 직관에 기초로 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과학은 종교는 적이 아니며 미래는 더욱 과학과 종교적인 대화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적인 관계라고 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한다면 오히려 종교와 과학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3. 예수그리스도에 삶에서 본 과학

과학의 역사는 인간이 우주의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해온 과정이다.-스티븐 호킹

나는 진화론을 신뢰하지 않지만 진화론의 과학적인 증명에는 동의를 한다. 왜냐하면 나 또한 한때는 과학도가 되는 것을 꿈꿔왔고 아직도 과학의 무한한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힘이 우주전체를 조망할 정도로 아니 구체적인 이론을 새울 정도로 발전 했으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무지 속에서 성경만을 바라보며, 문자적 혹은 의미적인 해석에 초점을 둔 것에 대한 나의 무지에 우선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

호킹의 빅뱅이론에 다르면 인류의 시발점이 약 130억 년 전 한 점(특이점)에서 거대한 폭발이 있어 시간과 공간이 생기고 그 후 중력이 생기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생겨 수소와 헬륨 등 네 가지 근본적인 힘에 따라서 별과 은하가 만들어졌다. 그 후 태양계와 행성이 생기게 되고 지구가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긴 시간의 여정을 거쳐 인류로 진화 해왔다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그렇게 인류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한 가지 정신적인 면에서 만은 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인류 생성의 전 과정에서 신의 존재가 개입한 사실을 과학적 입증에서 놀라움을 받았다. 아마도 이것은 초기 진화론에 대한 교육을 잘못 받은 것이라고 사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우주의 중심에선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서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끝자락에 서있음을 부인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우주는 우리가 바라보는 중신이 아니라 변두리였고 이것이 우리를 기준으로 할 때는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머무는 태양계 같은 우주가 수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게 되면 우리 또한 우리가 변두리에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성서를 바탕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성서를 바라볼 때 아니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분도 중심적인 사람들보다 변두리 사람을 무대의 중앙으로 이끄셨다고 본다. 우리가 우주의 변두리면서 우주의 중심 무대에 올라선 것처럼.

이러한 사상적인 바탕에서 과학의 시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무엇이었을까? 쉽게 접근하기 어렵지만 이는 바로 나눔의 삶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당시 시대의 상황 속에서는 변두리적인 삶속에서 역사의 중심무대로 들어가 사랑을 외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랑의 외침 속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자기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나눔이었다. 나눔은 생명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서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없는 자들이 자신의 것을 조금씩 떼어 주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시대에 이러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본다.

부단히 이것이 인간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리는 물론이거니와 인간과 잔연과의 관계도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이 얻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이기에 자연과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바라본다면 이러한 우리들이 삶이 현재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과학의 시대에 어떻게 생명의 길을 찾아가야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나침판이라고 보는 이유기도 하다.

4.신의 존재는 변하지 않는가?

신은 사람의 믿는 사람에게 세계 안과 밖에 존재하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이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종 즉 생명은 처음부터 고정된 형태로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진화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인류의 모든 문화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신의 개념, 신의 모습 신의 특성, 신에 대한 믿음의 내용은 역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시대와 맥락에 따라 변화되기에 이것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근본에 대한 질문이라고 본다.

다윈의 진화론의 핵심은 변이와 자연의 선택이다. 다윈의 진화론의 골자인 ‘자연선택’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생명현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한다, 다윈은 생물이 번식할 때 미세하지만 꾸준히 ‘변이’에 의해서 다른 환경에 적응해나가며 보다 유리한 생물학적 특성을 지닌 것들이 우세한 종으로 살아남을 통해서 결국 환경에 의해서 자연 선택되어 그 과정이 오랫동안 되풀이 되면서 결국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다양한 생물 종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진화론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윈은 진화론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다윈과 달리 성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을 창조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신조는 가장 핵심적인 교리중의 하나다,

이러한 논지에서 보면 진화론은 창조론에 대해 도전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토킨스는 보고 있다. 즉 그는 진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역사적이 포용 속에서 섭리하신다는 것을 놓고 접근한다면 진화론이 설득력이 부족해도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토킨스의 주장에 대해서 과학적인 빅뱅이론이나 환경에 종이 변이 할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다만 과학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신의 역사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지 진화론 자체를 전적으로 동의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토킨스의 유신론비판이 종교의 본질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의 피상적이고 현상적인 것에 집착해서 도덕적인 기원, 근원적인 실체를 부정하는 시도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윈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했던 내용이 생명이 하나의 종의로부터 오늘날의 풍성하고 다양한 종으로 진화 되었다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할지라도 그의 신 개념도 그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최초의 생각으로부터 발달되어 초월적이고 전능한 존재의 신 개념으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점 즉 특이점으로부터 시작한 인류의 시작은 그 특이 한 점을 관장하는 어떠한 존재가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에 신의 존재는 빅뱅이 이론에 의한 대폭발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에 한걸음 더 나아가 본다면 신에 대한 개념과 신앙이 인류문화와 역사를 거쳐 발전 되어온 것이라면 신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가상적인 존재란 말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저자처럼 신이 결코 신 증명론이나 혹은 부재 증명론을 통해서 증명되거나 부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을 믿는 이유 혹은 믿지 않는 이유를 강화하는 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는 신이라는 개념자체가 인간의 논리나 언어를 통해 증면 될 수 없다고 본다, 한걸음 더 나아가 나는 신은 사람의 믿는 사람에게 세계안과 밖에 존재하며 믿지 않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5.생명의 이해

기독교의 창조교리에 나타난 인간 중심주의가 생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린 화이트

현재 생태적인 위기 속에서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몸살을 격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미미 했던 문제가 이제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여기에 모든 종교 단체가 시대적인 위기 속에서 생태문제 즉 환경문제에 관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각 종교별로 하던 일들을 이제는 연대해서 생태문제가 우리의 생존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 종교연합체는 모든 생명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곳이 파괴되면 결국 모든 곳으로 여파가 미쳐 종국에는 회복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한다고 주장을 펼치며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 하고 있다.

이처럼 생태문제에 대한 자각이 일어남으로서 생명에 대한 존귀함과 돌봄, 나아가서는 인간이 창조질서를 가꾸는 청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지만(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를 볼 때)인간의 삶과 생태학적인 영향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린 화이트가 주장하듯이 기독교의 창조교리는 자연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 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아 자연과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키는 이분적인 사고를 낳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인간이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면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무조건적인 지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동물을 관리하라는 것으로 해석해야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자연과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생태적인 위기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생태신학은 이원론과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상호 연결성과 상화의존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주체가 DNA라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DNA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즉 생명의 주체는 몸을 가진 생명체들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DNA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생태계를 살펴본다면 인류의 생명공동체라는 일대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 생태계를 바로 바라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삶으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이것은 한걸음 더 나아가 생태계는 지구라는 행성과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살아 있는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으로 본다.

인류가 직면한 중요한 위기의 하나인 생태계의 문제는 단지 환경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물을 멸망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인류조차도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종말론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생명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할 때 생태학적인 영성을 회복하게 된다고 본다. 이웃생명과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 오늘 날생태위기속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살림과 돌봄의 메시지를 복음으로 삼고 전해야 한다.

 

III.나가는 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종교를 없애야 좋은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런 적인 결론이 아니며 단지 참된 종교를 세워야 하기에 참된 과학을 세워야 하기에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사람이 가진 세계관이라는 것은 한사화가 가진 세계관 나아가 한 문화가 가진 세계관 속에 속한다고 본다.

그러기에 작은 상자 안에 갇혀 하늘을 보며 그것이 하늘의 전부인양 하는 것은 신학을 업으로 하고자 사람으로서 좋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이분법적인 자세에서 한쪽에 치우친 생각이나 견해는 하나남의 창조질서에 대한 지평에 테두리를 두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화론 속에 숨겨진 과학의 놀라운 신비 속에서 임재 하는 하나님이 계시며 창조론 속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임재가 임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과 생물에 대한 청지기적인 사명이 조그마한 상자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해서 돌봄과 살핌으로 인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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