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와 헌금
구약의 십일조는 강제적이면서 율법적,
오늘날의 헌금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
https://youtu.be/ed7JEGDxXrU
신앙생활 하는데 잘하면 은혜로 울 수 있는 것이 헌금이지만, 시험에 들기 쉬운 것도 헌금입니다. 그래서 헌금이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헌금이란 부분은 목회자만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영역처럼 여기는 것도 그중 하나의 이유일 것입니다, 헌금에 대해 이야기하면 불충한 혹은 금기를 깨뜨리는 것이 아닌지, 믿음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우려감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각종 헌금 요구에 대한 설교에 묻지 않고 ‘아멘’으로 답을 하면서 누구도 거부하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무조건 수용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은 예배당 건축을 하거나 또 많은 물질이 필요하면 여러 가지 특별한 제목으로 예배를 갖으며, 또 부흥회라는 것을 개최하여 유명한 강사를 강단에 세워 , 말씀을 전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헌금을 작정하게 하여 헌금을 내도록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헌금은 기분에 내키는 대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도 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명확하게 설명되어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교회에 절기 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구역헌금 등등 많은 헌금목록이 있지만, 성경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헌금은 감사의 헌금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헌금에 대해 살펴보면, 주님의 백성들이 매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헌금을 하게하고 자신이 갔을 때는 헌금을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강제적으로 헌금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준이나 자세는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읽으시면 더욱 분명히 이해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중 몇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 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다” (고후 8:8)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헌금을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고후 9:11)
위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듯이 신약에서 헌금은 의무조항이 아니라 감사조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금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헌금, 절기헌금, 작정헌금 등등 각각을 구별함 없이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서 할 때 헌금은 그 자체로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헌금이 적절하게 쓰였는지 그릇되게 쓰였는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받고서도 그것을 복음전파를 위해 쓰이지 않는다면 ,구약 성경 말라기서에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이 말라기서를 인용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설교를 합니다. 말라기 3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밥벌이를 위하여 일하러 다니는 까닭에 제사가 중단된 사실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책망함을 나타냅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잘 못된 해석입니다. 말라기 시대는 구약의 율법이 적용 되는 시기입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강제적이면서 율법적입니다, 신약의 시대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의무가 없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효할까요? .
여전히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건강과 복을 누리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말라기서 3장 8~10절 말씀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에게(즉 헌금을 많이 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발 더 들어가, “하나님께 많이 드릴수록 많이 받는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고, 주님께서 복을 부어 주나 않나 시험하여 보라.”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도 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십시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사람들은 말라기서 3장 8~10절 말씀을 올바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라기서 3장의 그 말씀을, 헌금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한 예화로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헌금을 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 말라기서의 말씀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 아래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십일조를 하라는 명령은 모세의 율법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은 이미 폐하여 졌습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십일조를 하라는 명령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십일조의 원칙’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합당한 헌금을 할 때 물질적인 복을 누리게 되었듯, 오늘날의 우리도 합당하게 헌금을 하면 물질적인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물질적인 복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입장과 관련하여, 여러분과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말라기서 3장 10절을 포함하여) 구약성경에서, 물질적인 복에 관해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복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적용된 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는 의롭지만 가난한 사람도 있었고, 부유하게 사는 악인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악인의 풍요와 의인의 고통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십일조도 잘 내고, 의롭게 산다 해서 그 사람의 경제생활이 항상 풍족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물질적인 복을 내려 주겠다고 하신 구약성경의 약속을, 신약성경에서는 똑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불의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 앞에 물질적 풍요가 아닌 무서운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풍성한 헌금을 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셨다면,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새번역 고린도후서 8:2)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한 마게도니야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가난하게 살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신약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누가복음 6장 38절 말씀의 경우처럼) 기쁜 마음으로 주는 사람이 많은 것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은,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많이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많은 헌금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받는 복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풍성한 헌금을 하면 물질적인 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된다는 약속은 신약성경에는 없습니다.
신약시대인 오늘날,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감사로 우리의 가진 것을 당연히 누구의 강요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드려야하겠지요.
구원 받은 감격을 생각해보면 헌금은 부담이 아니라 감격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가 아닐는지요. 그것이 누구의 강요에 의해 행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헌금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강요해서도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누구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헌금의 많고 적음에 따라 믿음의 정도를 판단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이지 목회자나 옆의 성도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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